신교의 낭가사상
신교의 낭가사상
신교는 동방 한민족이 9천 년 역사를 지속할 수 있게 한 역사의 혼입니다. 이러한 신교 정신을 직접 실천하고 신교를 바탕으로 새 문명을 열고 나라를 개창한 역사개척의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낭가郎家입니다.
한민족사는 낭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환국 말기에 환인천제로부터 천부와 인을 받은 환웅을 따라 이주하여 배달을 세운 3천 명의 제세핵랑이 낭가의 시초입니다. 이 최초의 핵랑의 정신을 살려 배달은 삼랑제도를 시행하였습니다.
[태백일사-신시본기]에 인용된 고려팔관잡기에는 삼랑의 뜻을 이렇게 전합니다.
“삼랑은 배달 시대에 삼신상제님을 수호하는 관직이었습니다. 그래서 상제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백성의 잘잘못을 가려 복을 주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삼랑은 신교 정신으로 무장한 신교의 수호자이자 국가와 백성의 수호자였습니다. 배달의 삼랑은 고조선 시대에도 그 이름이 계속 전승되었습니다. 초대 단군이 재위 50년에 큰 홍수를 치른 후, 그 이듬해에 지금의 강화도에 성을 쌓고 그곳 마니산에 제천단을 쌓게 하였는데, 그 성을 삼랑성이라 하였습니다. 삼신과 하나를 수호한 살랑의 정신으로 백성을 재난에서 지키겠다는 단군왕검의 의지의표현인 것입니다.
13세 흘달단군에 이르러 단군이 고조선 전역에 소도를 많이 설치하여 신교를 진작시키면서 출범시킨 국자랑이 고조선의 정식 낭가입니다. 미혼의 자제들 중에서 선발된 이들은 소도 바로 옆에 지은 경당에서 글공부를 하며 활쏘기, 말달리기, 검술 등으로 체력을 단련하고, 예절, 가악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고조선 삼한의 경당에서 문무를 겸비한 인재가 나라의 동량으로 배출된 것입니다.
국자랑은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고 다녔으므로 천지화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후한서 동이전은 고조선의 낭도에 대해 “그들은 씩씩하고 용맹하며 소년시절에도 집을 짓는 자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환국 말기에 비롯되어 배달을 개척한 제세핵랑은 배달 시대의 삼랑과 단군조선의 국자랑을 거쳐 북부여의 천왕랑 ->고구려의 조의선인 -> 백제의 무절. 신라의 화랑 -> 고려의 재가화상(서긍의 고려도경). 선랑. 국선 등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고구려 국상 을파소는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 선인도랑이라 하고,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였습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같은 고구려의 영걸은 모두 조의선인으로 뽑힌 인물이었습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무예를 연마하고 신교의 진리를 터득하며 심신과 학문을 닦습니다. 그러나 일단 국가의 유사시에는 군대조직에 편제되어 직접 전쟁터로 나가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선봉이 되었습니다.
신라의 화랑에 세속오계가 있듯이 조의에도 계율이 있었는데 그것을 참전계라 불렀습니다. 그 참전계의 핵심 덕목은 충.인.의.지.예입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당시에도 국가 총동원령에 의해 조의 20만이 직접 전쟁터에 나가 130만이나 되는 수의 대군을 궤멸시켜 인류전쟁사에 기록을 세웠습니다.
1997년 7월 10일에 방영된 KBS 제1TV <역사스페셜>은 신라 화랑도를 전투 집단으로 여긴 기존 상식을 뒤엎고 본래 ‘제사를 지내는 집단’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낭郎이 삼신상제를 수호하는 관직이라고 기록한 태백일사의 기록을 여실히 뒷받침합니다.
신채호도 화랑의 연원을 상고대소도의식에서 찾고 있습니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강화도의 삼랑성은 단군왕검 때에 축조된 것이라 하는데 이때의 삼랑성의 랑이 화랑의 랑과 같은 글자이므로 화랑의 연원을 상고대소도의식에서 찾고 있고 또 화랑을 단군 때부터 내려오던 종교의 혼이요 국수國粹의 중심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신채호,[한국사연구초]149쪽)
그 후 한민족의 낭가사상은 고려 시대 윤관의 9성 정벌 때는 항마군으로 대몽항쟁 때에는 삼별초로 이어졌습니다. 고려가 끝나고 유교사회의 조선이 들어선 후 낭가의 명맥이 극도로 쇠잔해졌으나, 그 정신만은 한민족의 역사의식 속에 뿌리 깊이 잠재되어 조선 시대의 선비정신, 갑오 동학혁명, 의병운동 등으로 끊임없이 표출되었습니다. 한민족의 낭가 제도는 시대를 달리하며 그 명칭은 바뀌었지만 새 역사 개척의 원동력이자 추진력으로 면면히 계승되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민족 우주사상의 원형이자 인류의 시원 문화인 신교의 역사를 살펴 보았거니와, 지난 인류사를 한 그루 유실수의 생장 과정에 비유한다면 인류는 뿌리문화 시대와 줄기문화 시대를 살아왔습니다.
뿌리문화 시대는 온 인류가 신교의 단일 문화권 안에서 삼신상제님을 우러르며 살았던 때입니다. 문명사적으로 보면, 9천 년 전 중앙아시아의 천산에서 환국이 탄생하고 그 환국에서 동서남북으로 세계 문명이 분화된 때입니다. 동쪽으로 동북아 문명과 아메리카 인디언 문명이 태동하고, 남쪽과 서쪽으로는 수메르 문명과 이를 계승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유대 문화 등이 나타났으며, 북쪽으로는 초원에서 북방 문명이 생겨났습니다. 문명권은 이렇게 다양하게 나누어졌지만 뿌리문화 시대에 전 인류는 신교 또는 신탁을 통해 천상의 절대자와 직접 교감하며 살았습니다.
서양의 신탁도 신교의 일종입니다. 신탁이란 신의 메시지를 받아 내려 개인 삶의 방향을 정하고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문화입니다. 그리스 문화도 신탁문화이고, 고대 지중해 연안의 신비주의적 종교인 오르피즘이나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적 가르침인 영지주의도 신탁의 일종입니다. 소뼈나 거북이 등껍질을 구워서 그 갈라짐을 보고 신의 의지를 판단한 상나라의 갑골문화도 신탁입니다. 주역 또한 그 대의는 신의 의지를 알아내는 데에 있다고 볼 때, 뿌리문화 시대의 동서양 문화는 모두 신교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 후 BCE5000년을 전후하여 지구촌의 각 지역 문화권에서 위대한 성자와 철인이 출현하여 인류 문명이 획기적으로 도약하였습니다. 줄기문화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류의 원형 종교인 신교의 뿌리문화시대가 끝나고 유교, 도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줄기문화 시대로 이어져 다양한 종교가 생겨났습니다. 공자, 노자, 예수, 석가 등이 종교 문화를 일구는 동안,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인들이 대거 나타나 철학의 세계를 개척하였습니다. 또한 17세기 이후에는 과학이 발달하여 종교, 철학과 더불어 줄기문화 시대에 문명의 3대 축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류는 성숙기의 열매문화 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지금 우리는 모든 인류 문화와 역사가 그 시원처로 돌아가 하나로 수렴되는 원시반본의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으로 분화된 인류의 종교 문화도 장차 하나로 통일됩니다. 그 통일과 수렴의 중심에 동서 문화의 모체인 신교가 있습니다.
인류의 뿌리문화인 신교가 유불선 줄기문화로 분열되었다가 이제 하나의 열매문화로 완성됨으로써 인류사에 새 시대, 새 문명을 열게 됩니다.
출처 : 환단고기 완역본 (안경전 역주-상생출판 497~499쪽)